"후우..."
옥상 난간에 기댄 채 카사마츠는 고뇌에 잠겨 미간을 찌푸렸다.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하늘은 견딜 수 있는 시련만 준다고 했다. 개뻥이다. 진짜 개뻥이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이런 한숨을 쉴 일도 뭣도 없었을 것이다. 나이 서른에 이 무슨 개떡 같은 상황이란 말인가. 저물어 가는 붉은 해와는 다른 푸른 유니폼이 카사마츠의 한 쪽 손에 들려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나풀거리고 있다. 한때는 카이조의 당당한 주장이었지만, 이제는 그저 평범한 회사원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 이 유니폼을 들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키세 때문이다. 하늘은 자신에게 사랑스러운 연하 애인을 내려준 대신 그 애인의 생각과 개념을 가져가셨다. 아, 한숨이 폐부 끝에서부터 밀려온다. 카사마츠는 하늘에 대고 당당하게 가운데 손가락을 번쩍 쳐들었다. 엿 먹으라지.
사건의 발달은 간단했다. 벌써 이십대 중반을 훌쩍 넘겼는데도 아직까지 철이 들 생각이 전혀 보이지 않는 연하 애인과의 내기 덕분이었다. 그날은 키세도 모처럼의 오프였고 카사마츠 자신 또한 칼 퇴근을 한 날이었다. 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을 보내게 되자 밀린 집안일도 함께 하고,(물론 그 와중에도 다양한 스킨쉽을 했다) 연인과의 찐한 밤도 보내고, 느긋하게 소파에 드러누워 맥주 한 캔씩을 손에 들고 농구 경기를 봤다. 연인과 더 애틋한 시간을 보내고픈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그 아오미네와 카가미의 경기라는데 볼 수밖에 없지 않는가. 물론 키세는 결사반대를 외치며 카사마츠의 허리춤을 잡고 엉엉 우는 시늉을 해댔지만,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손길에 언제 떼를 썼냐는 듯 기분 좋게 무릎에 얼굴을 부비였다.
카가미와 아오미네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욱 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운동선수 치고는 나이가 있는 편이지만 이십대 초반인 애들보다 더 팔팔하게 현역으로 뛰는 것을 보면 진짜 체력도 실력도 괴물 같은 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새 그 둘의 경기에 빠져들어 카사마츠와 키세는 티비 앞으로 슬금슬금 자리를 옮겼다. 아오미네의 폼레스 슛을 카가미가 엄청난 점프로 막아내는 것을 보며 저절로 손에 땀이 흥건하게 배었다. 저기서, 좀 더! 그렇지!, 아오미넷치! 힘내요! 카가밋치 거기서는!!
입으로 툭툭 튀어나오는 응원과, 코치의 말을 뱉으며 카사마츠와 키세는 초조하게 주먹을 폈다 쥐었다를 반복했다. 마치 카사마츠 자신이 저 경기장에 있는 것 마냥 온 몸이 긴장이 됐다. 초조하게 숨을 내쉬며 좀 더 티비 앞으로 엉덩이를 옮기는 그때 축축한 손바닥으로 키세가 카사마츠의 팔목을 잡았다.
"으아아악!"
너무 긴장하고 있던 탓일까, 그저 팔목을 잡았을 뿐인데 카사마츠는 온 집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놀란 키세도 같이 아아악! 하고 맞 비명을 질렀고 그제서야 카사마츠는 제입과 키세의 입을 턱하고 막았다. 민망함을 동반한 적막이 거실에 저녁노을마냥 붉게 퍼져나갔다.
"뭐,뭐야. 왜 잡았어!"
"그, 선배 저희 내기 할래요?"
뜬금없는 키세의 말에 카사마츠는 미간을 찌푸렸다. 재밌게 잘 경기 보고 있는데 흐름끊는 것도 모자라 헛소리까지 해댄다. 배? 허리? 둘 중 어디를 때릴까 하고 고민하며 가볍게 주먹을 쥐자, 키세가 재빨리 그 위를 자신의 두 손으로 덮는다. 그리고 화사하게 눈을 접어가며 생긋 미소지었다. 최대한 안 맞아보려는 발악이었다. 허나 사람의 손은 두 개고, 카사마츠는 자유로운 한 쪽 손으로 옆구리를 가격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키세가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내었다. 끙끙 거리는 것이 딱 동네 똥개였다.
"무슨 내기?"
"카가밋치랑 아오미넷치 중 누가 이길지 맞춰봐요.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아? 너는 누구한테 걸건데?"
"아오미넷치요!!"
기다렸다는 듯 키세의 입에서 아오미네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중학교 때 왜 아오미넷치 빠돌이라 불렸는지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키세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아오미네의 칭찬이 튀어나왔다. 아오미넷치가 얼마나 농구센스가 뛰어난지 알아요? 중학교 때 부터 완전 달랐다니까요? 기적 중에서도 최고! 기적의 에이스! 아오미넷치 카피 하는게 얼마나 힘든데요! 왜냐면 아오미넷치 농구가 엄청나니까! 진짜 아오미넷치 존경해!! 아오미넷치, 아오미넷치, 왕옹왕왕!! 아오미넷치라고 짖는 개도 아니고 끊임없이 아오미넷치를 외쳐대는 키세를 보며 카사마츠는 울컥했다. 평소라면 어, 아오미네는 뛰어난 선수지. 하고 넘길 말이 왜 오늘따라 짜증이 나는 건지. 욱하는 마음에 카사마츠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카가미의 농구에 대해 일장연설을 펼쳤다. 야, 카가미가 짱이거든? 점프하는 거 봤냐? 어? 성장속도 봤냐고! 완전 천사거든? 장난 아니거든?
아오미넷치, 카가미. 이 두 명의 이름을 미친 듯이 외치며 둘은 티비 속에 그들을 응원했다. 서로의 칭찬에 배알이 꼴려서 꼭 제가 응원하는 사람이 이기기를 빌고 또 빌었다. 어디 응원할 데가 없어서 외간 남자 응원을! 하고 맘 속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확 치밀어 올랐다. 그 열기를 소리 지르는 것으로 풀겠다는 듯 둘은 목이 쉬도록 응원했다.
승자는 아오미네였다. 아니 키세였다. 쉰 목소리로 아오미넷치!! 하고 외치는 꼴을 보며 카사마츠는 빈 맥주 캔을 화면 속 카가미에게 던졌다. 너 이 새끼 우리 팀 이길 때의 기백은 다 어디 간거야. 저깟 검둥이한테 져? 장난해? 짜증이 나 뚱한 표정을 짓는 카사마츠 옆으로 키세가 슬금슬금 다가온다. 선배 약속은 지키셔야죠. 입꼬리를 씩 올려 살랑대는 모습에 카사마츠는 굵은 눈썹을 더욱 찌푸릴 뿐이다. 어리광을 가득 담아 선배_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승자의 여유가 물씬 느껴졌다.
"뭐! 왜! 뭔데!"
"선배, 소원 들어줄 거예요? 들어줄 거죠? 남자가 한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설마 상 남자 중 상 남자인! 우리 선배가! 두 말! 하진 않겠죠?"
"소원이나 말해. 짜증나니까."
온 얼굴을 구기며 너는 차마 못 씹겠으니 대신 욕이라도 씹어먹겠다는 표정의 카사마츠를 보며 키세는 해맑게 외쳤다.
"카이조 유니폼 입어주세요!"
헐.
어이없는 키세의 말에 카사마츠의 표정이 굳어졌다. 혹시나 발이 날라 올까 몸을 움츠리던 키세는 아무것도 다가오지 않자 슬며시 옆에 붙어 재잘댔다. 카가미랑 아오미넷치 보니까 카이조 때가 떠오르더라구요! 그러다보니 그때의 선배가 보고 싶고! 사실 제가 반한 것도 선배가 유니폼 입고 저한테 손 내밀어줬을 때잖아요? 그 순간의 감동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달까. 아 물론, 지금의 선배도 엄청 좋지만요! 미쳤니? 돌았냐? 유니폼? 유우니이포오옴? 좋아. 몇 대 맞을래. 정하게 해주지. 너 다음 주에 촬영 있다고 했지? 얼굴은 되도록 피해서 즈려밟아주마. 지금 내 나이가 몇인데 유니폼 같은 소리하고 있네. 너 설마 그거냐? 교복취향? 이 새끼 변태 아냐?!
"선배 애인이거든요? 말 좀 이쁘게 합시다 우리!"
"아, 그럼 이쁜 말이 나오게 예쁜 짓을 하던가!"
윽박지름과 함께 발길질을 날렸다. 온 몸으로 맞아가면서도 키세는 왁왁 소원을 들어달라고 외쳤다. 온갖 폭력과 협박에도 꿋꿋하게 유니폼을 입길 주장하는 키세 때문에 결국 카사마츠는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현재 혼자 옥상에 올라와 좌절하는 중이다. 내일 모레면 서른이다. 풋풋한 십대의 느낌이 남아있을 리 전무했다. 더군나 회사를 다니게 된 이유로 현저하게 줄어든 운동량 덕에 그때의 탄력은 찾아볼 수 도 없다. 물론 모델인 애인을 둔 덕에 꿀리지 않기 위해 군살이 붙지 않도록 꾸준히 운동은 하고 있다. 다만 키세가 보고 싶은 건 그때의 자신일 텐데, 지금 그 모습이 남아있을리가 없었다. 착잡한 마음으로 유니폼을 내려다보던 카사마츠는 다시 한 번 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 인생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카사마츠는 겨우 맘을 다잡고 내려와 옷을 갈아입었다. 사실 옥상에서 몇 번이나 유니폼을 태울까 말까 고민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경비나 아파트 주민에게 신고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현실적인 고민이 결국 손에 달랑달랑 유니폼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침대 위에는 언제 준비 했는지 레그슬리브까지 놓여있었다. 분명 아까까진 유니폼만 있었는데... 뒷목이 바짝 땡겨오는 것 같았다. 여러모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는 준비성이 철저한 키세였다. 오랜만에 레그슬리브를 신자 발목부터 탄탄하게 감싸오는 감촉이 묘했다. 예전에는 어떻게 이걸 신고 다녔지. 무릎까지 올라오는 레그슬리브와 함께 수치심도 같이 올라온다. 완전히 그 때의 복장으로 갈아입자 기분이 이상했다. 체육관을 울리는 농구공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공의 촉감이 손끝에서부터 살아났다. 농구화와 체육관 바닥이 마찰하며 끼긱거리는 소음이 귓가에 맴돌았다. 농구 하고 싶다,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선배 다 입었어요?"
방문이 거세게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금발이 얼굴위로 쏟아져 내린다. 숨이 막힐 정도로 꽉 안아오는 팔의 감촉에 온 몸의 근육이 소리를 지른다. 이런 열렬한 스킨쉽을 받아줄 만큼 자신은 젊지 않다. 등에서 우득 하는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 소리가 들린다. 살기 위해 있는 힘껏 키세를 밀어내자 푸른빛이 눈을 가득 채운다. 하얀 색으로 7이라 커다랗게 써진 숫자가 보인다. 카이조의 유니폼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3학년, 키세가 1학년 일 때의.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자세히 쳐다보자 키세가 밝게 웃고 있다. 자신만큼이나 키세도 변했다. 키도 더 컸고 얼굴도 성숙해지고 십대의 패기보단 이십대의 여유가 몸을 감싸고 있었다. 같은 사람 같은 옷인데, 전혀 달라 기묘한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잘 어울려서 새삼스레 가슴이 뛰었다. 놀란 듯 감탄하는 듯 커다래진 눈동자를 보자 키세의 마음이 벅차오른다. 그때의 카사마츠를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그때와 다를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때와 비슷해서 놀랍다. 역시 선배 파워 동안. 조금 미간이 느슨해지고 강하게 쏘아붙이던 눈이 부드러워 진것을 제외하면 카사마츠는 그때와 놀랍도록 흡사했다. 물론 그 자신은 늙었다며 푸념을 하겠지만.
키세가 처음 카이조에 들어온 날처럼 둘은 마주보고 서있었다. 키세의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때 이후로 몇 년 뒤에도 이 사람과 이렇게 마주 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사람이 자신을 이끌어주고 있다는 것이 이 사람과 함께 라는 그 사실들이 너무나도 벅차올라 가슴이 뻐근했다. 숨조차 쉽게 쉬지 못할 만큼 감동한 자신의 숨통을 직접 트이게 해주겠다는 듯 그때와 같이 카사마츠의 매서운 발길이 날아왔다.
"넌 또 왜 입고 나왔어!"
"그것 때문에 때린 거야? 너무하다는 생각 안듬까?!"
"징그러워! 이제 곧 삼십이 교복이라니 징그러워!"
"엄연히 운동복이거든요? 그리고 이케맨인 저는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거든요!"
그닥....
전혀 아니라는 카사마츠의 표정에 키세는 상처 받았다. 아, 저거 진심이다. 젠장. 좁혀진 미간과 슬쩍 가라앉은 눈빛이 선명하게 말해준다. 위아래로 흩어보며 쯧 하고 혀를 차는 그의 행동에 키세는 입을 불퉁 내밀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의 매력을 모르는 면이 어찌나 둔감하고도 얄미운지.
"억!"
미워도 사랑이라고 키세는 카사마츠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 마치 블랙홀에 휩쓸리는 우주 비행사 마냥 쑥 하고 키세의 품으로 끌려간 카사마츠의 이마에 키세의 단단한 가슴팍이 부딪혔다. 아까와 비슷한 상황에 카사마츠는 한숨을 쉬었다. 또 한 번 푸른빛이 가득 시야를 채운다. 개인적으로 파란색은 좋아하기도 싫어하기도 하는 색이다. 하늘같아서 바다 같아서 카이조의 색이라 좋다가도, 파랑을 두르고 뛰던 키세가 생각나서, 그 때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서 싫어지는 색이었다.
이런 자신의 마음을 눈치 채고 있던 걸까. 그때와 같은 옷, 같은 피어싱을 하고 키세가 제 앞에 있었다. 언제든지 선배가 원하면 돌아갈 수 있어요, 라고 말하는 듯 환하게 미소 짓는 모습에 괜히 배알이 꼬였다. 언제 이렇게 커버린 걸까. 하긴 내가 사람 다 만들어놨지. 온갖 기술을 이용해 두드려 패 결국 사람을 만들어낸 제 자신에 대해 뿌듯함이 차올랐다. 진짜 이 몇 년간 부모의 마음으로 사랑의 발길질을 몇 번이나 했는가. 어디 보육 프로그램에 나가고 전혀 전문가에게 꿀리지 않을 제 자신이라고 카사마츠는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예상외로 빨리 깨졌다. 저를 향한 감동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카사마츠를 현실로 되돌려 놓은 것은 슬쩍 허리춤을 더듬는 손길이었다. 조금 서늘한 체온이 손가락 끝에서부터 희미한 열기를 흩뿌리며 슬금슬금 바지 안쪽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앞에도 조금 두툼한 무언가 닿는 게 기분이 나쁘다. 아랫배 쪽에 무언가가 묵직하게 닿는다. 위를 쳐다보나 애매하게 웃는 키세의 얼굴이 보인다. 사람을 만들어놓은 줄 알았는데 그냥 개를 키웠나보다. 카사마츠는 느긋하게 손을 풀며 발등에 힘을 꽉 주었다. 매섭게 날라 오는 발을 보며 키세는 눈을 꼭 감았다. 이렇게 될 줄은 알았지만 역시 억울한 건 매한가지다.
"야, 짐승! 개새끼!"
"이게 다 선배 때문이거든요? 선배 레그슬리브 때문이거든요?"
"변태새끼! 나 이거 원래 신던거거든?"
"그래서 그때도 선배만 보면 벌떡벌떡 서가지고 얼마나 당황, 악!"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나불대는 주둥아리를 향해 카사마츠가 주먹을 날린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조금씩 부어오르는 뺨을 느끼며 키세는 바락바락 대들었다. 카사마츠 또한 지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