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한 빛 무리가 카사마츠의 방안을 가득 채웠다. 굳게 닫은 커튼 사이로 이 빛이 새어나갈까 염려되었지만 이내 카사마츠는 빛의 중심으로 시선을 돌렸다. 작게 일렁이던 빛들은 이윽고 서서히 커지며 방안을 가득 채웠고 그 안에서 누군가의 인영이 보였다. 카사마츠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여도 보이는 눈부시도록 밝은 금빛이 발밑을 휘영 찬란하게 비추었다. 아, 너로구나. 빛 무리에서 부드럽게 나래짓 하며 다가오는 천사를 마주 안으며 카사마츠는 웃었다. 포근하게 감싸오는 날개가 사랑스러웠다. 입을 뻐끔거리며 키세 하고 부르자 당신이 부르는 그 사람이 내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사랑스럽고도 사랑스러운 내 키세.
"오랜만이야."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숨기는 그가 사랑스럽다는 듯 키세는 빙긋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벙긋벙긋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말하는 그를 보자 목구멍이 꽉 막혀오고 손바닥이 저릿저릿했다. 하얀 피부와는 어울리지 않는 검붉은 흉터들이 마구잡이로 키세의 목을 감싸고 있었다. 예수께서 이 세상의 어리석고도 안타까운 백성들을 위해 기꺼이 썼던 가시관을 키세는 카사마츠를 위해 기꺼이 목에 썼다. 그만큼 순결하고도 흉측한 흉터였다. 새하얀 그 목을 옥죄는 듯한 흉측한 꼴이었다.
그 흉터를 바라보다 카사마츠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가 않는다. 혹시 말이 나오기 전 울음이 먼저 터져나올까봐 입술을 깨물고 그저 가만히 참아내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 미안해 키세. 아마 자신이 아니었다면 저 흉터는 없었을 것이다. 키세가 목소리를 잃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는 카사마츠를 보며 키세는 난처하다는 듯 웃었다. 이 사람은 늘 그랬다. 자신이 택한 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도리어 더 아픈 표정을 지어서, 죄책감이 늘 묻어나는 표정이여서 그게 참 아프다.
'나 괜찮아요.'
어깨에 머리를 부비며 어리광을 부리는 키세를 보며 카사마츠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간지러워. 하지마. 퉁명스럽게 말하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소중하다는 듯 쓰다듬는 손길에 키세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런 소리 없이 바람 같은 숨결만 가득찬 웃음이었지만 카사마츠는 키세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것이 애처로와 카사마츠는 입술을 꾹 깨물며 울음을 참았다. 턱이 덜덜 떨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티내지 않으려 애를 쓰며 천천히 손을 움직여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금발이 손끝에서부터 조금씩 손가락 그리고 손바닥 전체에 닿았다. 팅커벨의 요정 가루가 묻어나는 것 마냥 제 손에도 금빛이 묻어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좋다는 듯 키세가 어깨에 뺨을 부벼왔다. 조금 옅은 분홍색으로 물든 뺨이 그가 얼마나 지금 기뻐하고 설레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넌 너무 어리광이 많아."
'이런 나도 좋아하면서.'
"들켰네."
뻐끔뻐끔 한 글자씩 내뱉는 키세의 단어들을 주워 모아 그 뜻을 이해하고는 카사마츠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만약 네가 몰랐다면 곤란해 하는 네 표정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카사마츠의 생각이 눈에 보이듯 휜 한 키세가 얼굴에 놀리는 기색을 띄웠다 아마 자각하지 못하겠지만 카사마츠는 제 표정을 숨김없이 들어내는 편이었다. 굳이 그 속을 파헤치려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얼굴만 보면 다 알 수 있었기에 키세는 카사마츠의 얼굴을 보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다만 자신과 눈을 마주치기 전 제 목의 흉터를 보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처럼 얼굴을 우그러뜨리는 카사마츠 때문에 그가 먼저 눈을 마주치기 전까지는 절대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한번 뜯겼다가 엉성하게 꿰맨 것 마냥 키세의 목은 끔찍한 모양새였다. 그 흉터를 직접 새긴 것은 어떻게 보면 자신이었다. 카사마츠를 얻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신만을 사랑하고 모셔야 할 천사가 인간과 사랑에 빠졌다. 라는 어느 삼류 영화에나 나올 고리타분하고도 따분한 이야기다. 우연히 지상계로 내려온 천사는 작은 마을의 청년과 사랑에 빠졌고, 그는 곧 신을 배반하는 행위와도 같았다. 결국 천사는 인간과 헤어져야만 했고 하늘에서 사흘밤낮을 울었다. 자비로운 신께선 감히 자신을 배신한 천사를 지옥으로 보내기지 않았고 단지 목소리를 앗아가는 벌을 내리셨다. 신의 음성을 대신 전달하는 자가 천사기에 당연한 수순이었다. 성대를 갈라 목소리를 빼앗기는 대신 천사는 청년을 얻었다. 키세는 카사마츠를 얻은 대가에 비하면 이 정도는 가벼운 편이라고 생각했다.
카사마츠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서로 사는 곳이 다른 탓에 그들이 만날 수 있는 것은 자주라고 해봐야 며칠에 한번 정도가 고작이었다. 카사마츠는 인간의 몸이었기에 천상계로 갈 수 없었고, 키세가 인간계에 머무르는 경우 천사의 영향력이 그 땅과 나라에 미쳐 정해진 운명을 거스를 수도 있다. 결국 둘은 서로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만날 수 있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삼 일에 한 번, 어쩌면 한 달 또는 몇 개월에 한 번이 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더욱 더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연인이었다. 더없이 소중해서 함부로 만지지 조차 못했다. 상대방이 손을 내밀어줘야만 겨우 그 손을 맞잡는 경우가 허다했다. 저번에는 서로 눈만 마주보다가 헤어진 적도 있었다.
'사랑해요.'
쉽게 전할 수 없는 말이었기에 키세는 그동안 참고 참았던 감정을 터뜨리기라도 하는 듯 마음을 전했다. 소중하게 그의 손을 잡고 제 성대에 가져간 채 몇 번이고 사랑을 고백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 네 글자를 발음 할 때 마다 찌르르 하고 목이 울린다. 그 떨림은 고스란히 카사마츠에게 와 닿았다. 음성 대신 전해지는 숨소리와 작은 떨림이 두근거리는 심장소리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하나의 고동이 된다. 그 고동은 다시 한 번 더 카사마츠의 심장이 되어 쿵 쿵 하고 가슴을 울렸다.
"사랑해요."
키세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전하며 카사마츠는 입가에 키세의 손을 가져갔다. 목가의 떨림으로 제 마음을 전한 키세 마냥 카사마츠는 차오르는 숨결과 부드러운 음성으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였다. 울듯 미소 짓는 키세의 표정이 너무나도 예뻐서 사랑해요, 사랑해요. 라고 몇 번을 말했다. 결국 키세는 눈물을 떨어뜨렸다. 물기가 가득 고여 이리저리 일렁이는 눈빛이 곱다. 금빛이 이리저리 흔들리다 결국 자신의 눈에 곧게 맞닿았다. 둘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빙긋 웃었다. 천천히 얼굴이 틀어지며 완벽히 입술이 맞닿았다.
사랑이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