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마츠는 침대에 핸드폰을 던졌다. 키세와 통화를 하고 나면 늘 있는 일이었다. 키세는 얼굴만 번드르하지 싸가지가 개차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사마츠가 키세를 놓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피사체 만으로는 최고였다. 아, 몸만 아니었어도 벌써 패고도 남았는데. 카사마츠는 애꿎은 베개만 주먹으로 내려쳤다.
키세는 첫 만남부터 싸가지가 없었다. 새학기 초반, 이번에 들어온 신입생 중 다비드가 있다며 저들끼리 수근거리는 여부원들의 대화를 들으며 카사마츠는 콧웃음을 쳤다. 다비드가 들으면 어이없어서 뺨을 치겠다며 구경을 간 카사마츠는 제 뺨을 내리쳤다. 쭉쭉 뻗은 몸에 늘씬한 키, 얼굴 비율까지 완벽하잖아. 저놈은 그려야 해. 쓸데없는 미대생의 사명감에 불타오르며 카사마츠는 연습장을 꺼내들었다.
그 후, 카사마츠는 키세를 몰래몰래 따라다니며 크로키를 했다. 신체가 워낙 좋아서 그런지 그리는 사람도 신이 났다. 카사마츠는 신명나게 그려댔고 키세의 그림은 나날이 늘어났다. 그날도 변함없이 운동장 쪽 계단에 앉아 농구를 하는키세를 슬쩍슬쩍 훔쳐보며 크로키를 하던 카사마츠는 갑자기 제 위로 그늘이 지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키세가 자신의 연습장을 보고 있었다. 저에요? 뜬금없이 물어보는 목소리에 카사마츠는 어색하게 끄덕였다. 대답이 끝나자마자 키세는 그대로 제 그림을 찢었다. 이거 사생활 침해 아니에요? 허락없이 이렇게 그려도 되는거에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한 쪽 면이 거칠게 뜯겨나간 연습장을 든 채 저를 노려보는 카사마츠의 모습에 키세는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누가 화내야 될 상황인데.
"그렇게 날 그리고 싶으면 무릎이라도 꿇어보던지."
멋대로 제 그림을 찢어놓고는 하는 말은 가관이었다. 무슨 꽃보다 남자 주인공이라도 된 것마냥 오만하게 내리는 명령에 카사마츠는 주먹을 얼굴에 내려찍을까 아니면 명치에 날려야하나 고민했다. 그 순간 키세의 긴 기럭지가 눈에 띄었다. 주먹에서 멋대로 힘이 풀렸다. 미대생으로서 솔직히 포기하기 어려웠다. 저런 육체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선택은 이미 났었고 포기는 빨랐다. 쪽팔림은 한 순간이지만 명화는 길이길이 남는다. 명언을 제 멋대로 바꿔가며 카사마츠는 마음을 굳혔다.
연습장을 제가 앉았던 자리에 턱하니 던지고 천천히 무릎을 꿇는 카사마츠를 보며 키세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말하면 보통은 화내거나 욕을 하며 가는데 이 사람은 무릎을 꿇고 있다. 방금 전 까지 화를 내며 노려보던 게 거짓이라는 듯 표정도 매우 평온하다.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니가 꿇으라매!"
놀란 맘에 급하게 팔을 잡고 일으켜세우자 미간을 찌푸리며 성질을 낸다. 굵은 눈썹이 휘어지는 모습에 키세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야쿠자 같아. 짜증난다는 듯 흙이 묻은 바지를 탁탁 털고는 카사마츠는 키세의 멱살을 잡았다. 나 무릎 꿇었다. 네? 너 이제부터 내거다. 네? 핸드폰 내놔. 네?
"네 밖에 할 줄 모르냐?"
"어, 아뇨."
카사마츠는 키세의 바지 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적이더니 금새 핸드폰을 찾아냈다. 제 이름과 번호를 빠르게 입력하고는 자신의 핸드폰으로 문자까지 보내 완벽하게 번호를 따갔다. 전광석화같은 그 행동에 키세는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눈뜨고도 코 베어간다는 속담은 들어봤어도 눈뜨고도 번호를 강탈당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 설마 나한테 관심이 있었나. 그래서 날 따라다니고 그리고 번호까지...
"혹시 게이임까?"
미친놈.
카사마츠는 키세의 머리통을 그대로 세게 내려치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둘 모두에게 잊지못할 날카로운 첫만남이었다.
그 후 카사마츠의 부름에 의해 키세는 종종 카사마츠를 만났다. 용건은 간단했다. 너만큼 좋은 피사체가 없으니 그림 좀 그려보자. 였다. 거절할 이유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허락할 이유도 없었다. 키세는 당연히 거절했다. 그리고 또 한번 머리통을 내주어야만 했다. 무릎까지 꿇었는데 감히 거절을 했다는게 이유였다. 카사마츠가 무릎을 꿇은 시간은 1초도 안됐었다. 억울하다며 반론을 펼친 키세에게 카사마츠는 주먹을 날렸다. 남자다운 대답이었다.
가뜩이나 없는 뇌세포들이 아예 죽어버릴 것 같아 키세는 울며 겨자먹기로 허락했다. 하지만 심통은 여전해서 만날 때마다 카사마츠에게 딴죽을 걸었다. 동정, 체리보이. 여자 손은 잡아봤음까. 등등.
오늘 하루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이었다. 아무도 없는 미술실에서 단 둘이 앉아 여유롭게 따사로운 햇살을 즐겼다. 카사마츠의 피사체가 된 이후로 유일하게 좋은 것이 있다면 바로 이 평화였다. 여자애들의 뒤엉킨 향수 냄새도 꺅꺅거리는 소리도 찰칵거리며 몰래 찍는 카메라 소리도 없는 조용하고도 한가한 이 시간을 키세는 매우 사랑했다. 그리고 그 평화는 카사마츠에 의해 쉽게 깨졌다.
"야, 벗어."
무심한 카사마츠의 말에 키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쳤슴까? 날카로운 비명이 미술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걸죽한 남자 목소리가 울러 퍼지는 꼴에 카사마츠는 귀를 막았다. 아, 시끄러. 평소 버릇 처럼 키세를 때리려다가 카사마츠는 손을 거두었다. 자신의 손자국이 남아서는 안됐다.
"누드화 한번 그려보자."
"선배, 진짜 미쳤어요? 누드화라뇨. 제가 왜 벗어야 돼요. 선배 진짜 게이 맞져. 그래서 제 몸을 막!"
"뭐라는 거야! 난 네 몸만 있으면 돼"
"변태!!"
손을 엑스자로 모아 가슴에 포개며 여자애마냥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키세의 모습을 보며 카사마츠는 주먹을 쥐었다. 머리는 때려도 표가 안나니까 좋았다. 찰랑하니 금발이 손에 감기는 맛이 좋았다. 이제야 입을 다문 키세를 보며 카사마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이 툭하고 나와있었지만 그것은 제 알바가 아니었다. 키세는 정말 피사체로는 완벽했다. 시원스럽게 뻗은 팔다리와 알맞게 붙은 근육들, 그리고 타고난 뼈대가 딱 제가 원하는 몸이었다. 옷을 입은 채로는 그 몸을 완전히 표현하기 어려웠다. 가려진 것들을 모두 치우고 온전하게 그 몸을 그려보고 싶었다.
"어차피 남자끼리인데 뭐 어때."
"아, 싫어요! 누가 들어오면 어떡함까!"
"이 시간에는 아무도 안들어와. 할거야 말거야."
카사마츠의 말에 키세는 슬쩍 카사마츠를 쳐다보았다. 커다란 눈동자에는 꼭 자신을 그리고 싶다는 소망이 가득차 있었다. 그니까 저 눈이 문제였다. 첫 만남부터 그 눈에 흔들려 결국 여기까지 왔다. 곧은 눈빛으로 간결하고도 단순하게 누가봐도 쉽게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전하는 모습에 몇 번이고 흔들렸다. 지금도 곧게 제 감정을 그대로 전하는 모습에 키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소매의 단추를 풀었다. 그래, 모델 촬영한다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간편해졌다. 누드 화보는 이미 몇번 찍어본 상태였기에 사실 남 앞에서 벗는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훌렁훌렁 옷을 벗는 키세를 보며 카사마츠는 재빨리 그림을 그릴 준비를 했다. 몇 시간동안 벗고 있어야 될 키세를 위해 히터도 틀었다. 이윽고 다 벗은 듯 편하게 자세를 취하는 키세를 보며 카사마츠는 입을 작게 벌렸다. 좋은 몸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좋은 몸일 줄이야. 책으로만 봤던 황금비율이 제 눈앞에 3D 입체로 다가오자 어디서부터 그려야 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추워요. 빨리 그려요."
"어, 아, 미안."
짧은 사과를 마치고 카사마츠는 빠르게 집중했다. 한 번 선을 긋기 시작하자 우려와는 다르게 슥슥 그려지기 시작했다. 입술을 앙 다물고 연필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카사마츠를 보며 키세는 슬쩍 마음속으로 웃었다. 앙다문 입술과는 달리 편안하게 풀린 미간이나 초롱초롱 빛나는 눈이 꼭 어린애 같았다. 가뜩이나 눈도 큰데 두상까지 동글동글해서 카사마츠는 입만 다물고 있으면 저보다 어려보였다.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손을 보며 키세는 제가 어떻게 저 사람에게 비취지고 있는지,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다..됐다."
희미하게 울려퍼지는 목소리에 키세가 고개를 들었다. 완성이 되었는지 카사마츠는 뿌듯하게 웃고있었다. 옆에 놓인 담요를 몸뚱아리에 돌돌 감은 채 키세는 카사마츠에게 다가갔다. 맨 발에 닿는 바닥의 감촉이 서늘해서 기분이 좋았다. 커다란 도화지 속 흑백의 자신이 있었다. 나른한 듯 오만하면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이 담겨져있었다. 누가 봐도 홀릴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선배 눈에는 제가 이렇게 보여요?"
"응?"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카사마츠는 키세를 쳐다보았다. 카사마츠의 시선이 느껴질텐데도 키세는 그림만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거 저 주세요. 나직하게 흘러나온 말에 카사마츠는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까지 만족스럽게 그려진 그림은 오랜만이었다. 아무리 그림 속 모델이 달라해도 줄 수는 없었다.
"이거 저잖아요."
"너지."
"그럼 저한테도 소유권이 있는거 아니에요?"
"그건 아니지."
조용하게 툭툭 내뱉던 말은 어느 새 말다툼 처럼 번져있었다. 그러다가 서로의 몸을 툭툭 치며 말을 하며 조금씩 몸싸움으로 까지 번져나가고 있었다. 달라는 키세와 절대 못준다는 카사마츠의 의견은 어느 한쪽도 굽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못 참겠다는 듯 키세가 벌떡 일어나자, 카사마츠도 따라서 일어났다. 몸을 꽁꽁 싸맸던 담요를 풀어 헤치며 이 몸이 누구건지 알아요? 하고 외치는 말에 카사마츠도 욱해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저 몸뚱아리는 쪽팔리게 무릎까지 꿇어가며 얻은,
"내거다!!"
"웃기지마요! 그럼 제 눈앞에 있는건 제거에요!"
둘의 외침과 함께 미술실 문이 열렸다. 까르륵 거리며 즐겁게 들어오던 여자 둘이 흠칫 굳었다. 키세이 눈 앞에는 카사마츠가 있었다. 키세가 가리킨것은 카사마츠 바로 옆 그림이었지만, 이미 그들은 키세가 가리킨것이 카사마츠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앞에 카사마츠가 내거다. 라는 말의 파장도 없지 않아 있었다. 멍청하게 돌처럼 굳어있는 둘 사이로 조용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문 뒤로 행복한 사랑하세요. 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빠르게 뛰어가는 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빼도박도 못하게 호모로 소문나게 생겼다. 그림 한 번 그려볼려다가 헛소문만 빠르게 퍼져나가게 생겼다. 한 동안 둘은 계속 굳어있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