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만 청년 실업률이 높은 게 우리네 인생이라지만 이정도일줄은 몰랐다. 하긴 명문대 나와도 취업이 어려운 판에 겨우 고등학교를 마친 자신이 일자리를 바라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아무런 자격증도 스펙도 없는 처지에서 알바라도 구한 게 어디야. 꽤 일손이 급했는지 시즌 단기로 들어가게 된 알바자리는 이와이즈미의 됨됨이와 성과를 높게 봐준 점주 덕분에 단기는 장기가 되고 벌써 알바를 시작한 지 2년 반이 다 되어가고 있다. 급여도 오르고 있고, 부모형제가 있는 것도 아니라 단칸방에 제 홀몸 하나 건사하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대로만 쭉 이어지기만 해도 좋겠다는 안일한 생각도 했다. 백화점을 찾는 손님들한테 무시당하거나, 모욕적인 말을 듣더라도 한번만 꾹 참으면 월급이 나온다. 어차피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자신은 꽤 무쓸모하다. 무쓸모적인 존재한테 쓸모가 없다 라고 말하는 게 꼭 욕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진짜 정말 이렇게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며 이와이즈미는쭈그리고 앉아 마저구두들을 정리했다. 세이죠 백화점 3층, 에스컬레이터에서 4번째 구두 매장 판매 에이스의 등은 듬직하고도 쭈구리 같았다.
*
"이와이즈미군, 잠깐 심부름 좀 부탁해도 될까?"
"아, 네. 괜찮습니다."
"아유, 미안해. 원래 내가 가야하는데 오늘 오기로 한 손님이 워낙 까다로워서. 내가 매장에 붙어있어야 될 것 같아서 말이야. 잠 좀 깨게 커피 내거랑, 여기 직원들 것 좀만 부탁할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카드를 건네는 그녀의 얼굴에는 이미 다크서클이 광대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어제 새로 물건 입주하는 곳에서 벌어진 실수를 수습하느라 3시간도 채 못잤다더니 평소의 깔끔하던 모습은 어딘가 붕 떠 있다. 하품을 쩍 하며 어떻게든 검은 눈 밑을 가려보겠다며 얼굴 이곳저곳을 두드리는 그녀를 뒤로 하고 이와이즈미는 백화점을 나섰다. 얼마나 까다로운 손님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자신이 커피를 배달하기 전까지는 안왔으면 하는 바라며.
커피는 모두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통일했다. 그것도 시럽 하나 안넣은 걸로.잠 깨기에는 차고 쓴게 딱이다. 빨리 나오기도 하고. 시간이 시간인지라 주문한지 10분도 안되어 제 몫까지 5개의 커피를 든 채 다시 백화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같은 백화점 안에 있다고 사이즈를 전부 업그레이드 해준 직원에게 절로 고마움이 퐁퐁 쏟아져 나온다. 이거 먹으면 완전 잠 깨겠구만. 올라가는 엘레베이터 안에서 콧노래도 부르고 머리도 조금 손질하며 여유롭게 매장으로 가던 이와이즈미는 이미 손님이 도착한 것을 보고 허리를 빳빳히 세웠다. 직원들 태도도 컴플레인의 한 요소가 되기에 최대한 정중하고 비굴하며 상냥한 태도를 취해야만 했다. 백화점에 온 사람들 중에는 간혹 여기 주인이라도 되고 직원들은 하인이라도 된 것마냥 꼬장꼬장하게 트집을 잡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점주가 까다롭다고 말할 정도면 얼마나 예민보스일지 감도 안잡힌다.
커피 들고가면 혼날 것 같은데. 그렇다고 밖에 가만히 서있기에도 그렇고. 슬쩍슬쩍 눈치를 보던 이와이즈미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고양이 발걸음처럼 살금살금 아무도 눈치 못채게. 어떻게든 매장 앞까지 온 그는 최대한 천천히 커피를 안전하게 보관할 만한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 딱 세발자국만 더 걸어가면 자신이 원하는 위치였다. 딱 세발자국.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그리 호락호락 한 편이 아니었으며, 차마 보지못했던 누군가와 툭 부딪힌 이와이즈미는 넘어뜨렸다. 불행 중 다행으로 자신과 부딪힌 손님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커피를 뒤쪽으로 쭈욱 뺐다.
쿠당탕 넘어지는 소리와 모두의 시선이 이와이즈미에게로 옮겨졌다. 찡하고 울려오는 무릎을 수습하기도 전에 그는 죄송합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신가요? 세탁비는 전부 이쪽이 부담하겠습니다. 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반복했다. 제발, 제발, 제발. 저 짤리면 안돼요. 싫어요. 이러지 마세요. 등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과 압박에 휩싸인 무게를 겨우 이겨내고 꾹 감았던 눈을 빼꼼 뜨면 제 앞에 있는 사람 구두와 바지 밑단, 바닥 어느쪽에도 갈색 얼룩이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다.
"저는 괜찮습니다. 다만.."
괜찮대! 다행이다! 야호! 하고 마음속으로 소리없는 아우성을 지르던 이와이즈미는 그의 뒷 말에 싸해졌다.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보면 제가 사고를 치긴 쳤는데 뭘 어떻게 친건지 감도 안잡힌다. 울리던 빵빠레가 짜게 식어간다. 커피 어디로 던졌더라 내가.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다보면 뒤쪽으로 던졌던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제 뒤쪽에 그녀와 어떤 남자가 서 있던 것도 기억난다. 그것도 매우 비싼 옷을 입은. 딱봐도 손님으로 보이는. 예민해보이는. 오늘 하루 그녀가 초조하게 다크서클을 가리게 만들었던 원흉같은.
"응. 맞아, 맞아. 저쪽은 괜찮아~이쪽이 안 괜찮은 거 뿐이지."
방정맞은 목소리가 귓가에 스친다. 제 앞의 남자에게 90도로 꺾었던 몸을 겨우 피고 고장난 로봇마냥 버벅 거리며 뒤를 바라보면 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이와이즈미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그대로 눈을 피했다. 자신도 수습해주지 못할 것 같다는 신호였다. 옆에 같이 일하는 동료를 다라보면 어느새 시선을 바닥에 고정해 있었다. 동료의 시선에서 왼쪽으로 쭈욱 옮기면 바닥 전체에 넓게 퍼져있는 커피가 있다. 그리고 커피에 흠뻑 젖은 구두 한 컬레도. 그 위로는 흠뻑 젖은 바지도. 아, 망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배상은 이쪽에서 전부 다 하겠습니다. 명함 하나만 주시면.."
"아냐, 괜찮아요. 실수 할 수도 있지 뭘. 근데 굳이 배상해주겠다면야, 음 그쪽 월급이 어떻게 돼요?"
"예?"
"월급 다섯달치는 줘야 될 것 같은데."
빠르게 속으로 셈을 해본 이와이즈미의 머리속이 하얘졌다. 이거 순 도둑놈 아냐? 고작 바지 하나와 구두 한컬레에 제 월급 5달분은 많아도 너무 많았다. 백화점에서 일하면서 온갖 명품들이 넘쳐나고 세상에는 돈지랄 할 것도 넘쳐난다는 사실은 분에 넘치게도 잘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이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각자 저마다의 분수와 팔자가 있는 법이다. 이와이즈미는 제 팔자가 아주아주 소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삼각김밥과 컵라면 하나 정도의 팔자. 저쪽 예민보스께서는 아니겠지만. 그대로 허리를 숙인 채 뻣뻣하게 굳어버린 이와이즈미 옆으로 동료들이 휴지며 걸레를 가져와 눈치를 살피며 바닥을 닦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배상 하겠습니다."
"어떻게? 그쪽 이제 곧 여기서도 잘릴 것 같은데. 아니면 집에 돈 좀 있나봐?"
빈정거리는 말투에 욱하고 쏘아부치려다가 다시 꾹 눌러 담았다. 그동안 들어온 거에 비하면 저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얼굴이나 좀 봅시다 직원분. 얼마나 귀한 얼굴이길래 사과하면서 얼굴 한 번 안보여줘요. 깐족깐족 빈정빈정. 딱 그 두개만을 넣어 섞으면 저런 말투가 나올듯 싶었다. 네놈 새끼한테 사과하느라 허리를 반쯤 접어내려가지고 얼굴을 못비췄습니다. 정말 송구해서 뒤져버리고 싶네요. 저도 똑같이 빈정거리며 이와이즈미는 깊숙히 숙였던 허리를 폈다. 분명 좀팽이처럼 생겼을 테지. 아니면 기름이 좔좔 흐르는 꼴이라든가. 최대한 죄송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든 이와이즈미는 그 표정을 유지하는 것도 잊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헐, 배우인가봐.
"이와이즈미씨."
"...어?"
메두사를 보고 돌이 되어버린 사람들 처럼 이와이즈미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상대편 얼굴 감상중이었다. 백화점에서 일하면서 연예인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와, 실물 대박. 좀 어디서 본 것 같긴 하지만 원래 연예인들이 다 이목구비 뚜렷하고 얼굴 작고 그렇게 생겼지 뭐.
한편 한마디의 사과도 없이 그대로 멈춰버린 이와이즈미를 보며 그녀는 초조함에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거기서 사과를 해야지 구경을 하면 어떡해. 이 바닥은 소문이 70%를 차지한다. 다른 고객들에게도 직원이 사고를 치고 그냥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더라. 라는 얘기가 들어간다면 바로 다른 매장으로 발걸음을 옮길 것이 뻔 할 뻔 자였다. 주의를 주기 위해 작은 목소리로 이와이즈미의 이름을 부르던 순간 이와이즈미를 보고 똑같이 눈을 동그랗게 뜬 남자를 보고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남자의 얼굴에는 아까까지만 해도 가득 했던 짜증이 싹 사라져 있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는 몰라도 좀 더 상황을 지켜봐야할 듯 싶었다.
"이름,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갑자기 공손하게 바뀐 남자의 태도를 보며 이와이즈미는 의중을 짚으려 미간까지 찌푸려가며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딱히 악의가 있어보이지는 않는다. 근데 이름은 왜.
"이와이즈미 하지메 입니다."
"혹시, 이와쨩?"
낯선 남자에게서 익숙한 거머리의 느낌이 난다.
이와쨩. 얼마만에 들어보는 별명인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적 제 옆집에 살던 애가 딱 저렇게 불렀었다.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며 이와쨩 이와쨩 하고. 입을 삐죽 내밀고 쳐다보면 눈가가 사르르 녹으며 이와쨩! 하고 손을 잡아왔다. 귀찮고 혼자 벌레 잡으며 노는 것을 좋아하던 자신에게는 그 애가 귀찮은 존재임은 틀림없었으나 그 웃음이 하도 예뻐 몇 번이고 손을 잡아줬다. 그 애가 이사가기 전까지만 해도 꽤 친하게 지냈던 걸로 기억한다. 눈뜨자마자 벨을 눌러 서로의 집에 놀러가고 놀이터며 공원이며 꼭 붙어다니고 맛있는 것이 있으면 반쪽 남겼다가 몰래 주고. 그러다가 10살때 헤어졌지만.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이사를 갔던 걸로 기억한다. 부모님에 차에 올라타면서도 걔 끊임없이 울었었지. 창문 열고 이와쨩, 꼭 만나러 갈게! 하고 엉엉 울고. 난리도 아니었지만 저에게는 아직까지도 꽤 감동을 주는 추억 중 하나다.
"이와쨩? 왜 대답이 없어? 아 혹시 내 잘난 미모에 반해서 넋을 놓은거야?"
그 순수하고도 감동적인 일화의 주인공인 놈이 이렇게 뻔지르하게 자랄리가 없다. 눈 앞의 남자가 그때의 토오루일리가 없다. 어쩌다가 닮은 거겠지. 그래야만 한다. 내 추억을 위해서라도.
"그, 누구신지..."
"엑! 설마 잊은거야? 우리의 소중한 추억을? 그 기억들을? 아니 아니 그전에 내 귀여운 얼굴을 잊어버릴 수가 있어?"
오이카와의 방정맞은 목소리에 매장 내의 사람들이 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아는 사이? 하고 동료들과 점주가 슬쩍 물어봤지만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저는 이와이즈미지 이와쨩이 아닙니다. 아마 우연히 닮은거겠죠. 도플갱어라던가 뭐 그런거. 사람이 우주로 가는 시대인데 도플갱어 쯤이야 널리고 널렸을 것이다.
"아냐, 이 못생긴 얼굴은 우리 이와쨩 밖에 없는데."
심각한 표정으로 울상까지 지어가며 제 뺨을 잡고 휙휙 돌려가며 살피는 손길에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그랬다. 우리 아들은 남자답게 잘생겼다고. 자신은 못생기지 않았다.
"이 까칠한 머리칼도."
"저기,"
"이 삐죽 올라간 못난 눈매도."
"저, 고객님?"
"툭 튀어나온 입도!"
"고객님, 잠깐 얘기를,"
"다 이와쨩이 맞는데 왜 아니라고 부정하는 거야!"
"저, 그 손 좀 떼시고 말씀을,"
"이 못생김은 우리 이와쨩이 틀림 없단 말이야!!!"
쩌렁쩌렁하게 매장 내를 울리는 목소리에 이와이즈미의 이성줄도 툭 하고 끊어졌다. 아니,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사람을 밑도 끝도 없이 못난이로 취급하네? 그것도 내 말은 다 씹으면서?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다부지게 주먹을 쥐었다. 어차피 잘릴 것 같은데 끝을 보자. 짜증나게 저보다 조금 위에 있는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오이카와가 사르륵 웃었다. 이와쨩! 그때처럼 사내놈이 곱게도 웃는다. 빌어먹게도 이와이즈미는 저 웃음에 터무니 없이 약했다. 그것도 여름날 매미를 포기하고 오이카와네 집에서 소꿉장난이나 하고 있을 만큼. 알고 그러면 악질이고 모르고 그런다면 더 악질이다.
"어떻게 아셨어요, 고객님?"
"얼굴이 딱 이와쨩인걸! 못생긴 게 딱! 우리 이와쨩!"
원래 이렇게 재수가 없었나. 싶어 추억을 떠올리면 이와쨩 외에도 오이카와가 꼭 부르는 애칭이 있었다. 못난이. 못난 이와쨩. 어릴때부터 싹수가 없었구나 넌. 측은하게 오이카와를 쳐다보던 이와이즈미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점주와 동료들의 눈빛에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아, 저기 배상은."
"됐어 됐어. 이와쨩한테 뭘 받아 내가. 나중에 술이나 한 잔 사! 아니다 오늘 시간 돼? 나랑 저녁먹을까?"
"저 말씀 중에 실례지만 이와이즈미군 오늘은 이만 퇴근해도 좋아요. 일도 없는데 일찍 가서 쉬어요."
점주는 생긋 웃으며 이와이즈미의 등을 툭툭 쳤다. 나중에 무슨 일인지 제대로 보고하라는 압박이 등에서부터 전달되어 오는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자 왜 그러냐는 듯 더욱 더 예쁘게 영엽용 미소를 띄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오이카와는 커피에 푹 젖은 신발을 신고도 좋다고 방방 뛰어댄다. 어디갈까 이와쨩! 점심은 아직이지? 같이 밥부터 먹을까?
처음으로 일하다가 사고 치고, 못본지 십 년이 훌쩍 지난 소꿉친구와 만나며, 그 덕에 처음으로 출근 2시간 만에 퇴근하게 되었다. 오이카와는 어느새 다가와 어깨에 팔을 걸치며 자신을 어디론가 끌고 가고 있다. 멀쩡한 척, 당황하지 않은 척 했지만 이와이즈미는 사실 많이 놀란 상태였다. 내일은 또 어떻게 설명을 해야하나. 벌써부터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멍하니 자신에게 끌려오는 엘레베이터에 탄 이와이즈미를 빤히 쳐다보며 눈 앞을 휙휙 손으로 저어도 반응이 없다. 오랜만에 본 이와이즈미의 모습에 저절로 기분이 들뜬다. 커피색으로 물든 양말안에서 발가락들이 꼼지락 거렸다.
"아, 진짜 뭘 먹고 이렇게 못생겼지?"
어깨에 걸치지 않은 손으로 이와이즈미의 볼을 주욱 늘리며 오이카와는 씩 웃었다. 지인짜 못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