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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27 [치아카나] 겨울 밤 1
글
[치아카나] 겨울 밤
앙스타 글 합작에 참가했었습니다.
하나하키 설정이에요.
쌍방향 짝사랑 세상존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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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카나]
겨울밤
by. 마루
입에서 와르르 서러움이 쏟아졌다. 보답받지 못할 것의 잔해였다. 익숙하게 컵에 물을 받고 입안을 헹궜다. 날카로운 결정에 잔뜩 쓸린 탓에 뱉어내는 물안에는 피가 섞여 있었다. 헐어버려 따가운 목을 쓰다듬으며 다시 입안을 헹구고 물을 뱉어냈다. 미처 뱉지 못하고 혀 뒤에 볼 안쪽에 붙어있던 것들이 물과 함께 떨어진다. 세면대 위로 가득 쏟아진 것은 몸 안에서 피를 빨아먹은 탓인지 붉게 물들어있었다. 치아키는 그것이 심장에서 자란다고 생각했다. 쿵쾅 쿵쾅 뛸 때마다 그 소리와 함께 피를 받아먹고 자라는 것이 틀림 없었다. 그래서 유독 붉고도 날카로운 것일테지. 아마 입 안이나 목구멍처럼 심장 주변도 잔뜩 헐어있을 것이다. 한참을 입안을 헹구고 난 뒤에서야 화장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선반 옆에 놔둔 약을 물도 없이 입 안에 털어넣고 삼켰다. 쓴맛이 혀끝에서 얼얼하게 아려와 바로 옆에 둔 사탕을 집어 먹었다.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등 여러가지 맛이 들어있는 유리병은 어느새 반이 넘게 비워져 있었다. 지금 먹은 것은 빨강, 딸기맛이었다.
사실 약이 효과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매번 약을 탔고 일정한 시간마다 꼬박꼬박 알약을 목 뒤로 넘겼다. 치아키가 걸린 병은 불치병이었다. 처음 이 서러움을 토해냈을 때 너무나도 놀라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었다. 어렴풋이 이 병에 대해 짐작하고 있어서 더욱 무서웠고 아니길 바랐다. 잔뜩 겁에 질린 제 모습과는 달리 의사는 덤덤하게 그의 증상에 대해 설명했다. 뽑아낸 혈액의 샘플과 초음파 검사 등 여러가지의 검사 결과를 보여주며 영어로 긴 학명을 설명하고 그는 이것이 요즘 유행하는 일종의 희귀 질병이라고 말했다. 치아키가 걸린 병은 피와 체액 등이 섞여서 단단한 결정을 이루고 그것이 몸에 일정한 양이 쌓이면 토해내는 증상을 보였다. 토해내는 그 결정의 모양이 작은 꽃잎 같아서, 정식 명칭보다는 하나하키 또는 꽃병으로 흔하게 불렸다.
하나하키. 세상 모든 일에 단순하고 정의와 전대물만에 관심이 있는 치아키라도 그 병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짝사랑이 깊어지고 또 깊어지면 견디다 못해 꽃을 토해내는 병이라고 들었다. 유메노사키에서도 몇몇이 이 병에 걸려 격리조치를 당했다. 그나마 졸업 후에 하나하키에 걸린 것이 다행이였다. 쓸데없는 소문만큼은 피할 수 있을테니. 한동안 병원에서 격리조치 되어 검사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손에는 작은 봉투가 들려있었다. 그 안에는 쪼개진 새하얀 알약이 수없이 들어있었다. 결정이 쌓이고 쌓이다 잘못하면 호흡기를 막아버려 질식할 수도 있기에 그를 방지하기 위한 알약이었다.
'알약이 결정을 녹이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토하는 일은 줄어들 것입니다.'
그날 밤 약을 한웅큼 먹고도 붉은 꽃잎을 방 한구석 가득 토해내며 치아키는 의사의 말을 되풀이 했다. 약이 효과가 있을 겁니다. 토하는 일도 줄어들 거에요. 괜찮아질겁니다. 지나가는 병이에요. 거짓말. 전부 거짓말이었다. 뱉어내는 꽃들은 늘면 늘었지 줄어들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련이 가득 남은 손은 변함없이 약을 털어먹고 매 달마다 약을 받아왔다. 한숨을 쉬면 옅은 피냄새가 났다. 날카로운 결정이 목과 입 안을 할퀸 탓에 매번 입을 헹굴 때 마다 피가 섞인 물을 뱉어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피가 섞인 탓에 꽃의 색이 일정하다는 거였다. 하나하키라는 병은 희귀하기도 하고 그 증상이 특이한 만큼 관련된 소문도 많았다. 대표적인 소문이 좋아하는 사람의 색을 띈 꽃을 토해낸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의 색이 노랗다면 해바라기를, 붉은 색을 지녔다면 장미를 심장에서부터 끌어내 입밖으로 뱉어내는 병이라며 그 얼마나 낭만적인지, 하고 사람들은 떠들어댔다. 낭만은 무슨. 제 입밖으로 튀어나오는 게 파란 수국이 아닌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자신이 걸린 병이 하나하키라는 것을 안 이후로 그동안 연락을 쭉 유지해오던 지인들과 차츰차츰 연락을 끊었다. 몸이 좀 안좋아져서 잠시 요양을 간다는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혀에 두르고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들을 웃으며 떠나보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몰래 좋아하는 그 사람과 마주해야 해서,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눈 앞에 떠오르는 파란색을 애써 모른척하며 운동화 끈을 단단히 매었다. 언제 병이 나을지 모르지만 다시 스턴트 배우로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관리를 해야했다. 체질이 몸을 가만히 하고는 못견디는 편이기도 해서 아침 저녁으로 꾸준히 러닝을 나가고 있다. 차라리 강아지를 키워볼까. 아케호시와 함께 산책을 가던 개의 종류가 어떤건지 곰곰히 생각해보며 녹슨 철문을 열었다. 끼긱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러퍼졌다. 저녁 내내 눈이 내렸는지 온 거리가 하얗게 물들어있었다. 아침과는 전혀 다른 풍경에 저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문 앞은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는지 내린 자리 그대로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천천히 발을 내딛으려다가 거두고 그대로 다리에 힘을 주고 훌쩍 뛰어 두 발을 동시에 눈 안에 파묻었다. 제법 깊게 쌓였는지 뽀드득 소리와 함께 신발 밑창이 눈 아래로 폭 잠긴다. 자신이 처음으로 남긴 흔적에 기분이 차츰차츰 좋아져온다. 만약 주변에 자신을 아는 이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어린애 같다고 핀잔을 놓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크게 웃으며 그 사람을 품 안 가득 껴안고 머리를 헝클어 줄테지. 멋대로 떠오르는 얼굴들에 저절로 쓴 웃음이 지어졌다. 이제는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이었다. 치아키. 어딘가 어리숙하고 살짝 쳐진 그 음성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치아키는 『변함』없네요."
머릿속으로만 떠올리던 음성이 바로 옆에서 들려왔을 때 이제는 꽃을 뱉어내다 못해 환청까지 듣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래도 눈 속에 파묻힌 발을 바라보고 있으면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와 툭툭 치는 손길이 느껴졌다. 치아키에게 할 말이 있을때마다 카나타가 보내던 신호였다. 여길 봐요 치아키, 나 할 말 있어요. 못 이기는 척 겨우 고개를 들면 새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카나타가 서있었다. 여전히 얇게 입고 다니는 모습에 걱정부터 덜컥 들었다. 아무리 감기에 잘 걸리지 않는 몸이라지만 이렇게 눈이 내리는 날에도 겨우 장갑이랑 목도리 하나만을 걸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줄도 모르고 치아키는 빠르게 자신의 모자를 벗어 카나타에게 씌우고 패딩도 급히 카나타의 어깨에 걸쳤다. 자신은 원래 체온이 높은 편이고 이제 곧 운동을 할 참이니 차라리 이정도가 적당했다. 추웠는지 눈처럼 하얗게 질린 살결을 아는지 모르는지 치아키의 행동에 카나타는 그때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그렇네. 거의 일 년만인가."
"그렇네요 『일 년』이네요. 잘 지냈나요?"
카나타가 말을 할 때마다 새햐얀 입김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가로등 불빛 아래 흔들리는 숨결이 안타까워 그대로 집어 삼키고 싶었다. 슬그머니 기어나오는 욕망을 억지로 눌러 죽이며 치아키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잘 지냈다! 졸업하긴 했어도 무적의 유성레드라고!"
"그런가요. 저는 『잘』 지내지 못했어요."
토라진 듯 카나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자의식 과잉일수도 있겠지만 아마 카나타는 치아키가 그리웠을 것이다. 이 곳까지 찾아온 것을 보면 틀림없었다. 일부러 아무도 모르는 이곳까지 숨어들었는데 그가 삼기인 중 한명임을 잊고 있었다. 그가 갖고 있는 친분을 이용한다면 자신이 있는 곳 정도야 금방 찾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년 씩이나 기다려준것은 분명 자신을 믿고 기다려 준 것이겠지. 믿고 기다려도 또 기다려도 오지 않는 자신에게 화가 나고 토라져 잘 지내지 못한 것일 테지. 그래서 결국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이 먼 곳까지 왔을 것이다. 바다에서 가장 멀고도 먼 이 산 속까지 말이다. 고생해서 온 카나타가 사랑스럽기도 하고 또 그만큼 밉기도 했다. 왜 넌 내가 너에게서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가. 마음속 흔들림을 들키지 않기 위해 겨울의 시린 공기를 폐부 깊숙한 곳까지 밀어넣었다. 차가운 공기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면서 몸속 다닥다닥 들러붙은 외사랑의 잔해들을 건들기라도 한듯 몸이 찌릿찌릿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카나타와 눈을 마주치면 늘 그랬듯 어딘가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치아키, 하나하키를 아나요?"
갑작스러운 카나타의 질문에 그대로 숨을 멈추었다. 자신조차도 두려워 함부로 입밖으로 내뱉지 못한 단어가 거침없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혹시 다 알고 왔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머릿속을 아무리 빠르게 돌려도 마땅한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보고 단순한 바보라며 놀리던 동기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들의 말이 맞았다. 어찌나 멍청하고도 바보같은지 안다, 모른다 그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멍하니 굳어있는게 다였다. 고요해진 그들 사이에는 가로등 불빛에 날아든 날벌레들이 타닥타닥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다였다.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그저 자신을 바라본 채 가만 서있는 치아키를 보던 카나타는 그런 그의 모습을 아무렇지 않아하며 말을 이었다. 언제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하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푸카푸카 하는데 갑자기 『꽃잎』이 나왔어요. 물고기들도 엄청 놀랐답니다."
카나타가 하나하키에 걸렸다는 말에 치아키는 눈을 크게 떴다. 카나타만큼은 그 병과 거리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얻지 못할 사랑이 어디있겠는가. 이토록이나 눈부시고 사랑스러운 사람인데. 그 누구라도 카나타가 사랑을 전하면 바로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가 하나하키라는 지독한 병에 걸렸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이런 병은 자신같은 바보나 걸리는 병이었다. 아니 그 전에 상대방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너무 부러워서 심장 부근이 지독하게 아파온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 앞이 멍하고 코끝이 찡해져 왔다. 자신은 절대 얻을 수 없는 상대방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그 사람이 부럽고 또 부러워서 울보 시절인 그때처럼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겨우 유성대의 레드로서 멋지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데 여기서 울면 결국 다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이럴때도 예외없이 튀어나오려는 꽃잎을 설움과 함께 목 뒤로 넘기며 애써 표정을 정리했다. 무어라 위로해야할까. 그렇게 말을 고르고 있던 찰나 카나타가 또 한 번 폭탄을 던졌다.
"있죠, 치아키도 『같은 병』 이죠?"
"...다르다. 나는, 그런 게 아냐."
거짓말쟁이. 비난하듯 조용하게 속삭인 음성이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자신을 꿰뚫는다. 역시 카나타는 다 알고 온 것이었다. 너에게 들킬 바에는 차라리 그 사랑에 질식해서 죽어버려야 했다. 굳이 살겠다고 고쳐보겠다고 미련하게 약을 먹던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친구로서 그의 옆에 당당하게 서겠노라고 한 맹세는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단 말인가. 이제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뿐이었다. 카나타의 비난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자신의 덧없고도 무거운 사랑에 질식하는 것 뿐이었다. 어느새 내리기 시작한 눈이 발등 위로 쌓이고 있었다. 자신의 사랑도 이랬다. 소리없이 다가와 천천히 쌓이고 그 위로 또 쌓여서 결국 완전히 그 안으로 파묻혀 버린다. 끔찍한 병이었다.
울상을 지으며 저에게로 손을 뻗어오는 카나타를 보며 치아키는 그대로 카나타를 품 안 깊숙히 껴안았다. 겨울 공기에 차게 식은 몸이 품 안 가득 들어왔다. 이 사랑스러운 이를 껴안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카나타의 발치에 떨어진 붉은 꽃잎이 이제야 보였다. 자신의 색이었다. 히어로의 색. 유성 레드의 색. 모리사와 치아키의 색. 단지 피가 섞여 이런 색이 나오는 것일 뿐이겠지만 그 어느 날 누군가가 떠들었던 소문처럼 카나타가 치아키를 사랑해 붉은 꽃잎을 뱉어내는 것 같아 마음 속 깊이 뿌듯함이 차올랐다. 기다렸는데 치아키가 안왔어요. 그래서 어떡해야 할지 몰라서. 더듬더듬 뱉어내는 카나타의 음성에 치아키는 껴안은 팔에 힘을 더 세게 주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먼저 그를 찾아갈 걸 그랬다. 지독하게 차이더라도 마음을 전해볼것을 히어로라 지칭하면서도 그 히어로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 용기가 있었더라면 이렇게 서로 멀리 돌아오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자신같은 게 아닌 용기를 내준 카나타가 진짜 히어로였다. 의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하나하키의 병에 걸린 사람들의 공통점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깊게 신경쓰고 있다는 겁니다. 애증이라던가 설렘이라던가 미움이라던가. 결국 본질은 사랑이죠.'
아, 본질은 사랑이라 이렇게 마음이 턱턱 막혀오는 것이다.